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에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정의 그리고 심판과 관련된 문제다. 영국 식민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미국을 건국한 국부들은 ‘독립 선언문’과 헌법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그 유명한 문장을 적었다. 이 구절은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여기서 말하는 <인간> 속에는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도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독립 선언문="">이나 헌법에 기록된 평등 운운하는 구절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면 인간은 법 앞에도 평등해야 한다. 법원 건물 앞에서 눈을 가린 채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조각을 보게 되는데, 이 조각상이 바로 법과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의 상이다. 유스티티아가 이렇게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미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특히 앨라배마 같은 남부 주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백인 중심주의가 유난히 심한 이곳에서는 정의의 저울이 늘 백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남부에서는 힘이 곧 정의로 통했다.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2백여년 전 건국의 아버지들이 천명했던, 그러나 지금의 빛바래너 민주주의 이상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던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를 단순히 미국에 국한된 인종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보는 것은 좁은 소견이다. 물론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흑백 갈등을 둘러싼 인종 문제는 좀 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기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뛰어난 문학 작품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 작품도 구체성과 보편성, 특수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앵무새 죽이기’는 굳이 분류하자면 성장 소설에 속한다. 성장 소설이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을 비롯하여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나이 어린 주인공이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을 말한다. 성장 소설 중에서도 ‘앵무시 죽이기’가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전통적인 성장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소년이 아닌 소녀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문학사에 우뚝 서 있는 성장 소설은 거의 하나같이 소년을 중심인물로 다뤄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이 어린 소녀를 화자와 주인공으로 삼은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물론 여기에는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성장 소설은 하나같이 인식론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경험을 겪으며 주인공은 아주 값진 삶의 교훈을 배우기 때문이다. 성장 소설에서 <배우다>, <깨닫다> 같은 낱말이 자주 쓰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앵무새 죽이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스카웃>이라는 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진 루이즈 핀치다. 이 소설은 스카웃이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직전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그러니까 줄잡아 3년동안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작가는 어른이 된 진 루이즈가 여섯 살에서 아홉 살이 되던 때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는 수법을 구사한다. 때로는 스카웃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이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녀의 그것이라고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품이 처음 시작할 때의 스카웃과 작품이 끝나는 장면에서 독자가 만나는 스카웃 사이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물론 나이를 세 살 더 먹었다고는 하지만 생리적 성장이나 육체적 발육을 훨씬 뛰어넘는 정신적 성장과 영혼의 개안을 느낄 수 있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가랑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나이가="" 부쩍=""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라고 밝힌다. 여기에서 스카웃이 말하는 나이란 다름아닌 정신적 연령을 가리킨다. 3년이 아니라 몇 년이나 몇십 년이 지나야만 비로소 배울 수 있는 삶의 교훈을 배운 것이다.

또한 스카웃은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오빠와="" 내가=""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대수를="" 빼놓고는=""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게=""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도 <자랐다>는 말은 두말할 나위가 없이 신체적 성장이 아니라 정신적 건강을 뜻한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는 대수를 제외하고 나면 별로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밝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카웃이 왜 그토록 제도 교육을 싫어하는지 알 만하다. 그녀는 학교 교실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터득한다. 스카웃이 이렇게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하는 데는 변호사인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의 역할이 무척 크다. 이 밖에도 오빠 젬과 미시시피에서 온 친구 딜을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듀보스 할머니와 모디 아줌마, 알렉산드로 고모,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 등도 스카웃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스카웃이 고통과 좌절을 겪으며 얻는 삶의 교훈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사랑이다. 스카웃은 말하자면 <타자>,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이와 반대로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래들리 집 현관에 서서 자신의 집과 이웃을 바라다본다. 늘 자신의 집에서 래들리 집을 바라보던 태도에서, 이제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래들리 집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입장에서 스카웃은 비로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라는 아버지의 말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다.

스카웃은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카웃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부 래들리는 바로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사춘기 때 친구를 잘못 사귄 탓에 잠시 읍내에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계기로 그는 평생 동안 집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마을 사람들로부터는 완전히 따돌림을 받고, 스카웃과 젬 그리고 딜 같은 아이들로부터 놀이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부 래들리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다. 앞에서 말한 스코츠로보 사건이나 로자 팍스 또는 오서린 루시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늘 서자 취급을 받으며 사회적 약자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톰 로빈슨의 사건을 통해 스카웃은 인간은 피부 색깔에 따라 구분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단 피부 색깔만이 아니라, 젬의 지적대로 몸속에 흑인 피가 단 한 방울이라고 섞여 있어도 흑인으로 취급받는 것이 무렵 남부 사회의 현실이었다. 유얼 집안 사람들처럼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흰 피부밖에 없는 백인들에게 흑인은 자신들의 울분과 분노를 터뜨리는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를 비롯하여 존 테일러 판사, 메이콤 군의 보안관 헥 테이트, 모디 앳킨스 같은 몇몇 백인을 빼놓고서는 하나같이 인종 차별주의자들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자못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애티커스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엽총을 사주면서 어치새 같은 다른 새를 죽이는 것은 몰라도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고 말한다. 다른 새들과 달리 앵무새는 아름다운 소리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쪼거나 창고에 둥지를 트는 등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새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부 래들리나 톰 로빈슨은 바로 앵무새와 같은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나 아집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